골로새서 1장 15절은 예수님이 분명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선언한다. 형상이라 번역된 헬라어는 아이콘(icon)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분이신지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라고 요한복음 14장 9절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완전하심과 영광에 있어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셨다. 예수님은 단순히 진리를 선포만 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애를 통하여 진리를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20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 우리를 일깨운다. 예수님은 그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능력으로 보여 주셨다. 예수님께서는 무리들에게 설교도 하시고 또 개인적으로 그들의 집에서, 갈릴리 호숫가에서, 길을 가면서 가르치셨다.
그러나 말씀하셨을 때마다 예수님의 영감 있는 말씀은 그가 사셨던 삶의 능력에 의해 입증되었다. 예수님의 삶은 그가 전하고자 하셨던 메시지를 확증하셨다. 예수님은 성육 신하 신진리이셨다. 즉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셨다(마 1:23, 요 1:1,14).
예수님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곧 바리새인들과는 현저히 대조적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말을 많이 하는 선생들이었다. 그들은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그들은 하루 종일 신학을 논할 수도 있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만든 복잡한 제도를 지켰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적인 말과 외적인 경건함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내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는 텅 비어 있었다. 그들은 위선자들이었으며, 예수님께서 여러 번 그들에게 그 점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3) 9).
예수님은 종교적인 지도자들과 정반대였다.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구현하시고 또 당시의 종교적 제도의 위선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는지 보여 주셨다. 그래서 무리들의 마음이 예수님께로 이끌렸다. 복음서들은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지만, 그들이 항상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이해했던 것은 아니라고 전한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예수님을 따라다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은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옵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약 2:14~17).
여기서 야고보가 하는 말은 너무도 명백하다. 믿음이란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한다. 즉 말이란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는 반드시 변화된 삶을 살게 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올바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 이러한 진리로 인하여 자신들의 의의 결핍, 곧 죄를 숨김없이 고백했던 창기나 세리들보다 종교 지도자들이 오히려 예수님의 정죄를 받았다. 바리새인들은 성실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말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관해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또 인정하지도 않았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5:20)고 경고하신다. 복음의 개요를 3분 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가장 유능한 증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유능한 증인은 끊임없이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하기를 기독교 신앙에 대한 가장 홀륭한 논증은 바로 그리스도인들 곧 그들의 기쁨, 사랑 그리고 하나 됨이라. 고 했다.
예수님을 본받음
교회 안에 예수님의 삶에서 특별한 사건들을 따로 떼어 내 어그 사건들을 둘러싼 복잡한 교리를 만들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점은 우리가 예수님과 전도에 관하여 말하고자 할 때 더육 고렇다. 예를 들면 우리는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음 만나셨던 사건 속에서 우리가 보기에 예수님의 전도 방법의 본질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예수님 의전도 방식을 형식화하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우리가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전도 방법을 만들려고 할 때 많은 문제와 위험이 따른다. 복음서들을 그냥 한 번 쭉 읽어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하나의 방법만을 사용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사용하셨던 예수님의 방법은 간음 중에 잡혀왔던 여자에게 썼던 방법과는 달랐다(요 4:1~42,8:3~11).
우리는 예수님께서 쓰셨던 어떤 전도 방법들을 사건과 분리해내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예수님의 전 생애를 주의하여 보고 예수님께서 만났던 사람들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음서들에는 예수님의 삶을 목격한 자들의 진술이 포함되어 있다(눅 1:2~3; 요 20:30,21:24; 요일 1:1). 그것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도록 기록되었다. 복음서를 탐구하면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예수님의 이웃을 향한 마음
예수님은 '당신보다 더욱 거룩한' 분리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님은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사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셨다. 그 결과 예수님은 일반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으시고 인정을 받으셨지만 종교 제도권에 의해서는 배척받으셨다.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이 아닌 갈릴리에서 사역하셨기 때문에, 안식일을 올바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문둥병자를 신체적으로 접촉해서 치료했기 때문에 그리고 창녀와 이야기를 하고 용서해 주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비난하였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이셨다.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죄인들을 찾아다니셨으며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 9:13)고 선언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앞을 가로막는 종교적, 사회적, 혹은 윤리적 장벽들을 거부하셨다. 사마리아인들은 그들의 종교적 신앙으로 인해 유대인들에게서 멸시를 받았으나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전도하셨다(요 4:1~42). 예수님은 또한 로마 관리의 아들을 치료하셨으며(요 4:43~53), 문둥병자와 같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자들을 손으로 만지시고 고쳐 주셨으며(눅 5:12~16), 세리를 자기 제자로 부르셨다(마 9:9).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예수님은 그들의 고통과 어려움에 무관심하시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단순히 지적으로만 관심을 가지시는 것으로 그치지도 않으셨다. 반대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예수님은 감정적으로 아파하셨고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셨다. 예수님은 속수무책인 그들 의상 황으로 인해 고뇌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을 때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듣고자 모인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셨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 (마 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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