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경제학 전문가들도 우리의 선택과 전혀 다르게 소개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 여기서 보여준 것은 분명히 경제학 실업 이론의 핵심이다.
경제학 전문가들이 생각하는 고용시장의 문제점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소개가 임금노동자의 잘못된 점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결국 이런 단점 때문에 스스로 불행을 자초한다고 말한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소개를 하다 보니 과학적 연구의 중요한 차원을 무시했을 수도 있다. 특히 과학적 연구의 도덕적 여파라는 차원을 무시했을 것이다. 우리는 임금노동자가 가진 각각의 단점에 해당하는 실업의 유형을 소개하면서 이것이 설명의 차원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과학적 설명을 강조하다보니 독자들은 실업 이론이 현실에서 가지고 있는 영원한 도덕적 차원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겁쟁이이건 약삭빠르건, 또는 게으르거나 충동적이거나 못됐건 간에 중요한 점은 거지들은 항상 자신 의무 능력의 대가를 치른다는 점이다. 이미 벌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거지들을 욕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들이 지은 죄와 그들이 받고 있는 벌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첫번째 문제는 죄와 벌의 상관관계에서 제기된다. 만일 노동계급의 악습이 실업을 생산해낸다면 노동계급의 좋은 점(좋은 점이 조금이라도 있다고 가정한다면)은 이를 반대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장점이 단점을 극복하도록 하여 결국은 완전고용을 부활해내는 상황 말이다. 만일 노동자들이 악하지 않고 선하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선행의 보상역시 실업이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은 매우 사악한 방법으로 선행을 하기 때문이다. 정의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이론에서도 노동자들이 이런 덕목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노동자들은 이 덕목을 왜곡된 방식으로 행하고 있다. 공정성의 모델 에이 우리에게 이를 보여준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이 상호성을지키려고 노력하고 임금만큼 일을 해서 고용주에게 보상한다고 할지라도 결국 실업은 발생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항상 자신의 기여를 너무 높게 추정하여 결국 자신보다 생산성이 더 높은 노동자가 받는 급여에 비추어 자신의 급여를 기대하게 된다. 따라서 기업가들은 노동자의 눈에 임금과 노동의 교환이 공정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경쟁 수준보다 더 많은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
경쟁 수준보다 높은 임금은 곧바로 실업으로 연결된다. 경제분야에서 공정성이란 개인적 기여의가치와 한계생산성이 같아지는 수준이라는 것을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 사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누구든지 내면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러한 덕목이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실업이 그토록 심각해지는 것에 대해 놀라서는 안될 것이다.
한쪽 집단에 대한 비판이 미치는 영향
과학적 접근을 하다 보면 너무 오랫동안 다음 문제를 외면하게 되는데, 두 번째로 제기되는 문제는 한쪽에 대한 비판의 방향을 그 반대로 돌려보는 것이다. 임금노동자들이 극악한 기회주의자들이고 임금과 노동 교환의 불완전성을 악용하는 존재들이라면, 기업가들은 백조와 같은 존재란 말인가? 물론 이처럼 답을 미리 알고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조사를 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아무리 믿어지지 않는 가설도 확인해보는 것이 과학인만큼 검토해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도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몇 가지 우려는 제외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업은 사기를 치지 않는다. 왜나하면 사기 치는 것은 기업에게 최적의 전략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연하면 기업은 명성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속일 수 없다. 왜 그런가? 기업이 노동자를 속이면, 그 기업에서 일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노동자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정보가 노동시장에 모두 알려지건, 그 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만이 알고 있다 건 간에 언젠가 새로운 노동자들을 채용할 때나 기존 노동자들의 고용을 유지해야 할 때, 이들의 임금 수준을 높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기업이 두 달에 한번만월급을 준다고 하면 당신은 그 기업에서 계속 일할 것인가? 물론 아니다! 따라서 사기를 치는 기업은 임금 비용이 계속 높아지고 노동자의 동기는 약해지며, 결국에는 이윤이 감소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기는 득이 되지 못한다. 사장님들의 정직함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이윤 극대화의 원칙과 시장의 게임이 상호 협조하여 도덕적 인간상을 창출해내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다.
자, 이제 신실업이론에 대한 논의를 마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 정치적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그 의미는 엄청나다. 이 이론의 메시지를 요약하면 실업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본성과 임금 거래
왜냐하면 실업의 원인은 노동자의 본성과 임금 거래에 동시에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게으르고 위험을 기피하려 하며, 임금 거래에는 불완전한 요인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정보의 비대칭성, 채용비용, 훈련비용 등. 따라서 노동시장이 시장이라고 계속 주장한다면 실업은 이 노동시장과 동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업을 없애기 위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사람들의 본성을 바꾸거나 노동계약의 상업적 '본질'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말이다. 이런 해결책을 제외한다면 어쩔 수 없이 실업은 어느 시대에나 그리고 어느 사회에나 운명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업은 시장경제의 상시적이고 탈역사적인 조건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본성이나 상업적 관계의 본질을 통해 실업을 설명하려는 유형의 이론은 처음부터 그 존재가 부정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실업은 항상 존재해왔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면 실업이 있었던 시기와 완전고용의 시기가 교차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이 경기에 따라 춤을 추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위와 같은 얘기는 아무것도 설명해내지 못한다. 정말 아무것도 말이다.
우리는 실업 이론의 전문가들에게 이와같은 비판작업을 요구할 필요조차 없다. 통찰력이 아주 조금만 있었더라도 그들은 현재의 실업이(그리고 1983~97년 사이에 나타난 실업률의 중가가) 생산의 가치 내에서 노동비용의 감소와 동시에 이뤄졌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것이다. 이는 실질임금이 생산성향상의 리듬을 쫓아가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까지 살펴본 실업이론이 말하는 이유와 정반대의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실업이론의 전문가들에게는 이런 최소한의 통찰력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 아닐까.
이것이 바로 노동경제학이라는 거대한 신화가 말해주는 실업이야기이다. 실업은 노동자의 합리적 행동의 결과이다. 그들은 노동시장의 불완전성으로부터 혜택을 보려고 쉴 새 없이 노력하며, 나아가 그들의 악한 성향을 발휘하여 시장을 불완전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는 거지들이 합리적으로 동의하는 자기희생의 신화인 것이다.
'신화'라는 표현은 과장되어 보이기도 하고 실망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노동경제학의 거대한 신화가 사실은 경제학자들의 모임이나 노동경제학에서 득을 얻으려고 하는 권력자들 외에는 통용되지 않는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이 신화의 상당수 요소들이 사회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렇게 노동경제학이 만들어낸 학술적 조형물들이 기업의 각종 회의나 경제분야 언론의 사설 그리고 세상 질서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 믿음 속에서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찌 발견하지 못한단 말인가? 결국 이 신화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사회적 지원은 게으름을 조장한다.
사회적 비용이 너무 높아 제대로 고용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는 최저임금이 너무 높은 수준이다. 노동자들의 불행은 자신들의 악습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항상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실업자들은 일하고 싶어 하지만 직장을 가진 자들은 게으름만 피우고 있다. 직위가 낮은 직원들은 더 이상 기업에 충성하지 않는다. 등등. 그렇다면 학술적 신화가 사회조직의 마지막 단계까지 점차 확산되는 것인가? 그리고 아래로 확산되면서 결국은 가장 최악의 형태로 변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정말 신화이기 때문에 사회의 공동작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좀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신화의 합리화는 일부 석학들의 작품임에 틀림없지만 사실 이러한 상상은 군중의 심리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2022.05.23 - [분류 전체보기] - 너무 앞서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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